옥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청나라와 일제 시기에 개척한 길인 미미도를 통해 대만의 개발사를 엿볼 수 있다. 청나라 말기에 열강 세력들이 중국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고, 대만은 기후가 온화하며 토양이 비옥하나 고립되어 있어 식민지를 삼기에 가장 적합했다.

청나라 동치시대에 일본 유구에서 발생한 목단사 사건으로 청나라 정부는 대신 심보정을 대만으로 파견하여 협상하도록 하였다. 심보정은 공을 들여 산을 개간하며 군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고, 대만의 북, 중, 남부쪽으로부터 길을 만들어 동부와 통하게 만들었다. 중로는 동포, 팔통관을 통해 박석각(화련 옥리)에 이르는데, 10여개월을 거쳐 광서 원년 (1875년)에 완성되었다. 전체 265화리 (약 152킬로미터)에 달하며, 오늘날 「팔통관 고도」라고 불리운다. 이 길의 사용목적은 중국 한인들의 후산 (동부) 개간사업에 이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개간 작업의 성과가 좋지 않아, 고도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팔통관 고도는 점차 황폐해져 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5년 원주민 관리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첫시작이 바로 원주민의 총기와 탄약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대정 3년 (1914년) 일본인이 원주민 무기 몰수 정책을 실시하면서 평안하던 뿌농족의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정 4년 라허아레이 형제는 뿌농족을 이끌고 대분 경찰 주재소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대분사건이라 칭하며, 대분 사건으로 형성된 일제항거 세력은 숙청되었다. 그 후 일제는 「팔통관 횡단도로」공사를 착공하여, 대정 10년에 완공시켰다. 전체 길이는 125킬로미터에 달한다.

명화 8년 (1933년) 라허아레이가 항복하면서 장장 18년동안 지속되던 뿌농족의 일제에 대한 항거는 일단락을 지었다. 청나라 통치 시기 팔통관 고도는 청나라 정부의 대만정책이 소극적인 억제에서 적극적인 개발로 전환된 중요한 이정표로서, 한인들의 개척을 위한 고난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기에 개척된 팔통관 횡단 도로 및 관산 월령 도로는 일본인의 원주민 관리정책의 산물이며, 그 곳에는 뿌농족의 피나는 일제 항쟁사가 숨겨져 있다.